한국과 일본

[한일비교](8)집단주의 일본

서의동 2012. 10. 23. 10:32

"한국인들은 왜 레스토랑이나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걸 내버려두는거죠?"

재일동포들과 저녁자리에서 한 중년 여성이 이런 질문을 해왔다. 답변이 궁색해 '공부로 고생하니까 그 외 시간에는 풀어주는 거 아니겠냐'고 둘러대고 말았다.   


올해 도쿄 가구라자카에서 열린 아와오도리 대회에 참가한 어린이들. by 서의동



일본에서 아이들이 전철안이나 길거리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례는 상당히 드물다.(물론 없지는 않다) 아이가 울거나 보채면 부모들이 달래보다가 도중에 전철에서 내리는 경우도 가끔 본다. 물론 아이가 운다고 해서 "조용히 시키라"고 짜증내는 승객들도 없다. 일본인들이 늘상 이야기하듯 '공기를 읽고' 부모가 알아서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당사국이지만 본토(오키나와를 제외한 나머지 국토)가 전란에 휩싸이는 것은 면했다. 1945년 전쟁이 말기로 치달으면서 본토 각지에 미군의 공습으로 도쿄에서만 10만명이 죽기도 했지만, 외국군이 시가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거나 민간인을 학살하고, 적군을 피해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언제 미군기가 날아와 소이탄을 투하할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마을공동체가 공지와 지침에 더 귀를 기울여야 했다. 어려울수록 공동체에 대한 의존이 높았던 것이다. 공습을 겪었을 뿐 지상전을 겪지 않았던 점이 일본사회의 공동체 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은 19세기 말이후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5년) 등 외국군끼리의 교전장이 됐고, 이후 일제 식민지 지배와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마을과 지역의 공동체가 철저히 파괴됐다.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에게는 피붙이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시됐다. 가족주의가 한국인들에게 지상의 가치가 된 것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고도경제성장은 농촌을 희생으로 한 공업화가 본질이었다. 농산물에 대한 저가격 정책으로 농촌에서 삶의 기반을 박탈당한 이들이 도시로 나아가 노동자가 됐다. 도시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생활습관도 기질도 다른 이들이 부대끼고 갈등을 빚는 '정글' 같은 곳이 됐다. 


도시에서도 정주(定住)할 여유는 없었다. 부동산 투기의 광풍이 불면서 사람들은 더 큰 이익을 좇아 이사를 해야 했으며, 세입자들은 몇년만에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마을 공동체의 가치가 형성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서울 일극주의(一極主義)는 갈수록 심화돼 지역에서 지켜야할 공동의 가치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전쟁, 수탈, 경쟁이 반복되는 현대사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공동체에 대한 가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셈이다. 아이들이 레스토랑에서 떠들다가 다른 어른들에게 혼나면 "왜 우리애한테 뭐라 하느냐"고 부모들이 발끈하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이상하게 느껴지는 광경에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었던 것 같다. 


반면, 일본에선 패전이후 재건과정에서도 농촌에 대한 수탈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농촌을 기반으로 한 자민당의 장기집권 체제가 지역에 여러가지 재정지원과 공공사업 등의 혜택을 안겨주는 이익공유형 체제가 되면서 불필요한 토목사업이 많긴 했지만, 일자리가 없어 도시로 떠나야 하는 사태까지는 초래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마쓰리 등 전통 집단행사를 통해 마을공동체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는 한편 이웃에 '메이와쿠(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에도시대부터 마을에서 따돌림 받는 것을 두렵게 여겨온 역사적 기억도 큰 역할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는 우리나라 반상회 격인 도나리구미(隣組)가 조직돼 주민들을 통제했고, 주민들도 이 체제에 의존해야 살 수 있었던 전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집단주의' 전통이 강하다. 가족보다는 집단을 더 중시한다고까지 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공공질서에 대한 의식은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