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 '북풍'을 잃어버린 아베

서의동 2018. 4. 4. 16:17

3월 한반도에 화해의 훈풍이 불기 시작했지만 봄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두 집단이 있다. 자유한국당과 일본 아베 정권이다. 자유한국당도 딱하지만 아베 정권도 낭패한 기색이 역력하다. 서훈 국정원장이 아베 신조 총리와 만나 방북·방미 결과를 설명하던 13일 일본 주요 일간지의 중견간부에게 전화로 물어봤다.  

 - 지금 아베 정권은 어떤 분위기인가.  

 “‘내우외환’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아베 정권은 사학스캔들이 다시 불거지면서 궁지에 몰려있다)”

 - 일본은 북한의 태도변화에 가장 당황하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일본이 대북압박에 가장 목소리를 높였으니. 아베 정권은 북·미 정상회담이 사전협의 단계에서 엎어지길 내심 바랄지 모른다.”

 - 일본도 미국처럼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면 되지 않나. 

 “이제 와서 대화하자고 머리 숙이기도 겸연쩍다. 북한에 대해 압박 일변도였던 게 탈이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던 트럼프 정부조차 ‘비핵화하면 대화하겠다’는 말은 해오지 않았나. 다른 나라들이 다 북한과 화해하고 일본만 외톨이로 남는 사태가 가장 우려스럽다.”

 

아베 총리에게 북한은 더할 나위없는 정치적 자양분이었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정일이 일본인 13명을 납치했고 이중 8명이 사망했다고 시인하고 사과했다. 당시 관방부장관으로 함께 방북한 아베는 “전원이 틀림없이 살아있을텐데 적당히 타협하면 안된다. 회담을 걷어치우고 돌아가자”며 고이즈미를 압박했다. 북한의 납치 시인으로 일본 사회는 패닉에 빠졌고, 목전까지 갔던 북·일 수교는 무산됐다. 이 때 아베가 보인 단호한 태도로 인기가 치솟으면서 2006년 총리자리까지 올랐다.   

 

2012년 재집권한 뒤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개조하려는 아베에게 북한은 ‘필수 전략자산’이자 ‘수호천사’였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북풍’이 불어줬다.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은 아마리 경제재생담당 장관의 정치자금 스캔들, 방위예산 증액에 대한 비판, 납치문제 해결에 미온적인데 대한 유족들 반발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3주 뒤 미군기지 이전이 이슈였던 오키나와현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북한 미사일이 오키나와 상공을 통과한다”는 위협론을 앞세워 승리했다. 지난해 2월 모리모토 학원 국유지 헐값매입에 아베가 연루됐다는 의혹도 사흘 뒤부터 본격화된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로 주춤해졌다.  

 

일본의 외교·안보는 미국이 쳐놓은 금지선을 넘어서면 안된다는게 불문율이다.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등 자주노선을 선택한 총리들은 여지없이 중도 하차했다. 2009년 집권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가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문제에 미국과 의견충돌을 빚다가 10개월 만에 총리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베는 굳이 이런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에 ‘전략적 무시’ 정책을 취했고, 트럼프 행정부는 압박으로 일관했으니 그대로 따라가면 됐다. 북한의 도발은 방위비 증액, 안보법안 통과에 안성맞춤의 명분이 됐다. 북한과의 대화는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인상을 주는 수준에 그쳤다. 북한 도발이 계속되는 한 아베의 정권운영은 ‘땅짚고 헤엄치기’였다.  

 

일본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聰)의 표현처럼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좌절된 내셔널리즘의 스트레스를 푸는데는 북한이 딱 좋은 대상이었다. 한국과의 위안부 갈등까지 더해 일본 사회가 ‘혐한·반북’ 기류에 휩싸였다. 그런 만큼 북한이 핵포기 의사를 비치며 역사적인 역회전의 시동을 걸었으니 아베와 일본사회가 받은 충격은 상상할 만 하다. 그의 평생 숙원이던 헌법개정도 동력을 잃게 됐다. 사학스캔들 2차 폭로로 촉발된 내정위기에서 구출해 줄 ‘북한의 도발’은 이제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그런 아베 총리가 서훈 원장과의 면담에서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모든 협력과 협조를 다하겠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한 태도변화다. 이번 기회에 담대한 역발상으로 대북 화해 대열에 나서는 것이 아베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지원하고, 이어 북·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대화에 나서는 수순이 바람직하다. 혹시라도 북·미 대화에 훼방을 놓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만두기 바란다. 일본이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에 기여하는 것은 20세기 한반도 강점에 대한 근원적인 속죄의 뜻도 있다. 일본이 2020년 도쿄올림픽 이전 북·일 수교를 목표로 외교정책을 재설계할 것을 당부한다. 

(2018년 3월15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