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여적]넌-루거법(2019.4.30)

서의동 2019. 8. 9. 23:36

북미 2차 정상회담을 위해 하노이를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경향신문DB

북한 핵문제를 들여다보면 영어 이니셜로 된 여러 개념들과 마주친다. 지난해 북·미협상이 본격화되면서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CVID가 대표적이다. 2차 북핵위기 이후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제시한 CVID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ing)’ 방식을 가리킨다. 리비아 핵폐기 과정에 적용된 CVID가 트럼프 행정부에서 재등장하자 북한은 ‘패전국에나 적용하는 방식’이라며 반발했다. 결국 지난해 북·미 1차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는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로 후퇴했지만 강경파들이 호되게 비판하자 트럼프 행정부는 다시 CVID로 돌아섰다.

 

북한은 비핵화 조건으로 CVID와 한 글자 다른 CVIG, 즉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안전보장(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Guarantee)’을 요구한다. 지난 2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도 핵심의제는 CVIG였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CVIG를 위해 6자 회담이 필요하다고 했다.

 

CVID가 비핵화의 원칙론이라면 실무적 방법론으로는 CTR, 즉 ‘협력적 위협감축(Cooperative Threat Reduction)’프로그램이 있다. CTR은 소련 붕괴로 인한 핵무기 확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미 상원위원인 샘 넌과 리처드 루거가 협력해 1991년 만든 넌-루거법(구소련 위협감소법)의 핵심개념이다. 이 법에 따라 미국은 1992년부터 4년간 매년 4억달러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에 제공해 수천기의 핵·생화학무기 제거와 핵·미사일 관련 인력의 직업훈련과 재취업 등을 지원토록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카자흐스탄 방문 때 거론한 ‘카자흐스탄 비핵화 모델’도 CTR에 기반한 것이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도 비핵화의 창의적 해법 중 하나로 CTR을 거론한 바 있다.

 

리처드 루거 전 의원이 지난 28일(현지시간) 87세로 별세했다.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컸던 그는 지난해 4월 CTR을 북핵 해법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협상 교착이 장기화되고 있어 CTR이 유행어가 된다고 해도 좀 시일이 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