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 ‘헬조선’과 ‘국뽕’을 넘어서려면(2021.2.25)

서의동 2021. 5. 25. 21:37

SBS뉴스 캡처 

1980년대 중반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신식국독자’(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 ‘식반’(식민지반봉건사회)인가를 둘러싼 논전이 대학가를 달궜다. 어떤 쪽이건 한국 경제가 대외종속적이고 전근대성을 면치 못하니 변혁이 필요하다는 인식론이었다. 하지만 당시 경제는 1970년대 말 불황과 1980년대 초반 외채위기를 딛고 재도약하던 참이었다. 이론이 미처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경제가 역동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은 민주주의는 후퇴시켰으나 경제 볼륨과 역량을 키우는 데는 소홀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노동은 물론 자본도 통제하는 총력전 방식으로 ‘원시적 축적’을 꾀했다. 박정희식 국가자본주의가 막을 내린 것은 1997년 외환위기다. 김대중은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의 대가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수입하는 대신 정보기술(IT) 인프라 확충과 대중문화 개방 정책으로 다음 세대를 예비했다. 노무현은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비판을 무릅쓰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며 개방형 통상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종속이론의 실례로 꼽히던 한국은 이런 ‘좌우합작’을 통해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 국가로 성장했다.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로 한계를 드러냈다. 용암처럼 물렁해진 국제질서는 코로나19로 액상화(液狀化)가 심화됐다. 코로나가 흑사병 이후의 유럽처럼 대전환의 계기가 될지는 지켜봐야 하지만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커진 것은 분명하다.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면밀한 정세 판단과 자기 역량의 객관화가 긴요하다. 그런데 지금껏 한국의 자기평가는 ‘헬조선’과 ‘국뽕’(‘국뽕’이란 비판을 받을 만한 자찬) 사이를 요동쳐 왔다. 박근혜 시대에 등장한 ‘헬조선’ 담론은 청년과 진보세력의 전유물이었으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보수세력들이 즐겨 쓴다. 평론가 한윤형에 따르면 “본인들이 한국 사회의 위대한 승리를 일궜다고 선전하면서도 상대 당파가 집권하면 망국을 예감하는 극심한 널뛰기 현상”이다. 그 배경에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 불가능해 보이는 쟁투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에 ‘헬조선’과 ‘국뽕’이 동거 중임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청년 세대의 좌절은 개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시대가 당장 올 것 같지도 않다. 격차 확대, 빈약한 복지와 성소수자 차별, 주거 불안정, 인구절벽 등 과제가 숱하다. 그런 한편으로 최근 유행하는 ‘K-’ 단어가 낯부끄럽지 않을 성취를 거둔 것도 부인해선 안 된다. 제조업, 민주주의, 대중문화, 방역 등 일부 분야에서는 선진국을 ‘추월’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1980년대생 논객 6명이 펴낸 <추월의 시대>는 40년 만에 재등장한 ‘사회구성체론’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세례를 동시에 받고 자라난 세대들의 시선은 윗세대들이 다투느라 놓친 사각지대까지 아우른다. 주장은 두 가지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화해할 시기가 됐고, ‘자학 사관’에서 벗어나 한국이 거둔 성취에 대해 제대로 값을 매겨보자는 것이다. ‘헬조선’과 ‘국뽕’이 공존하는 한국은 두 세대가 공동 주조한 결과물이라는 지적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시도가 주목되는 것은 두 세대 간의 공방이 초래하는 해악이 순기능을 훌쩍 넘어섰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을 둘러싼 정치권의 낯뜨거운 논란을 비롯해 실례는 얼마든 있다. 정책 차이가 크지 않은 사안에서조차 날을 세우다 보니 쌍방 모두 경직성이 커지고, 타협할 여백이 줄어든다. 연금·공공·조세개혁, 유연안전성 도입 등 회색지대 의제는 뒷전으로 밀린다. 정책의 커버리지가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 한·일관계의 의미 있는 시도들에 ‘좌빨’ ‘친일’ 모자를 씌워 망가뜨린다. 그 결과 한국은 ‘골대를 자주 옮기는’ 나라가 됐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외교정책이 정권마다 오락가락하는 것은 여간한 손실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외국에서 지혜를 빌리기 어려워졌다. 일본, 미국은 물론 오랫동안 등대처럼 빛나던 북유럽도 예전만큼 본보기가 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가보지 않은 길을 헤쳐나가야 할 상황이다. 이는 약소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때가, 상대가 거둔 성과를 쿨하게 인정하는 너그러움을 가질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발끈을 조이고 길을 나서기 전에 화해의 악수를 나누자. 그럴 자신이 없다면 운전대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