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심판이 선수 눈치보는 금융시장

서의동 2009. 6. 15. 19:42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금융시장이라는 경기장의 심판이다. 금융회사와 투자자들로 구성된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규정을 제대로 지키며 뛰고 있는지를 감독한다. 반칙은 적발해 벌칙을 내리고, 거친 플레이가 나올 경우 해당선수를 퇴장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심판의 경기운영 능력에 불신이 커지고 있다. 힘센 선수의 눈치를 보느라 퇴장감의 반칙에도 가벼운 벌칙으로 끝내는가 하면 스스로 룰을 어기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지난 3일 삼성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차명계좌를 만든 삼성증권 등 10개 금융회사에 기관경고 조치했다. 재벌총수 일가의 세금 포탈과 경영권 승계를 위해  1000개가 넘는 차명계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관리해온 중대범죄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것이다. 
삼성특검 과정에서 금융당국은 시종 삼성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삼성특검은 지난해 2월 삼성증권에 대한 포괄적 검사를 요청했지만 금융당국은 삼성이 차명계좌임을 시인한 그룹 임원 4명 명의의 10여개 계좌만을 검사하겠다고 했다. 이후 지난해 4월 발표된 특검 수사결과 차명계좌가 1199개에 달했고, 이중 상당수가 삼성증권 계좌로 확인되면서 삼성증권이 삼성그룹의 조직적인 차명계좌 개설·관리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처럼 수사당국에 의해 불법행위가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금융당국은 사건의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기다렸다가 1년2개월만에 경징계하는 데 그쳤다. 금융시장의 근간을 고의로 뒤흔든 불법행위에 대해 인가 취소나 영업점 폐쇄 등 중징계가 마땅하지만 심판(금융당국)은 삼성이라는 쎈 선수 앞에서 한없이 몸을 낮췄다. 

금융시장이라는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심판에 실망하고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훌륭한 심판은 휘슬을 자주 불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지만, 요즘 같아선 관중들이 휘슬을 불고 싶을 정도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지난해 전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에 대해 전문가들은 감독기관이 시장을 제어하지 못해 위기를 키웠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사후감독 강화로 충분하다며 금융규제 완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금융당국이 규제완화로 더욱 성행할 반칙들을 감당할 ‘역량’과 ‘의지’가 있는지는 삼성 비자금 사건에서 드러난 당국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여론의 눈총때문인지 금융위는 지난 9일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여론수렴을 위해 필요한 입법예고 절차도 생략한 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금융위는 지난해 10월 개정법안 마련 당시 입법예고했다고 해명했지만, 이번 법안은 지분소유 한도 등 핵심내용이 달라진 별도 법안이서 ‘꼼수’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경제개혁연대 등 4개 시민단체는 삼성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4일 “금융질서 유지라는 기본책무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감독당국은 신뢰를 잃었고, 한국금융산업 선진화의 걸림돌로 전락했다”고 논평했다. 금융당국은 자신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표현이 등장한 현실을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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