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톰이 못다한 말

서의동 2011. 8. 18. 10:12

도쿄 도심을 순환하는 JR 야마노테센(山手線)의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 역 플랫폼에서는 우리 귀에도 익은 발차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한국에서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됐던 <데쓰완(철완·鐵腕) 아톰>의 주제가다. 다카다노바바는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蟲·1928~1989)의 창작사무실이 있는 곳이자, 만화 설정상 아톰이 태어난 지역이다. 역 구내에는 아톰의 얼굴이 새겨진 기념스탬프가 비치돼 있고, 역사 맞은편에는 데즈카의 만화 주인공들이 그려진 벽화 담장도 있다.


데즈카가 일본의 만화잡지 ‘쇼넨(少年)’에 <철완아톰>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6년 뒤인 1951년. 10만마력의 출력을 내는 소형 원자력모터가 탑재된 아톰은 원자력보다 막강하고 안전한 그린에너지가 심장에 장착돼 있어 늘 선한 마음만을 갖고 인간의 편에 선다. 


패전으로 황폐해진 일본 사회는 아톰 만화에 열광하며 원자력이 이끄는 부흥을 꿈꿨다. 심지어 ‘탈원전’ 대열의 선두에 서 있는 교토대 원자력실험소의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 조교도 아톰을 보며 원자력 공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본이 원폭참사를 당한 지 9년 만인 1954년에 원자력발전 정책의 닻을 올린 데는 아톰이 핵에 대한 저항감을 누그러뜨린 영향도 있다.


하지만 세간의 오해와 달리 데즈카는 과학문명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경고해왔다. 그는 생전에 “원전은 안전성이 확립되지 않았고, 하물며 인간이 관리한다. 인간은 실수를 범하는 존재”라며 아톰을 원전 캐릭터로 쓰려는 전력회사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동료들은 회고한다. 데즈카의 작품세계에는 과학기술 남용으로 인류가 비극을 겪게 되는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아톰만화의 1980년대 버전에 “죽음의 재를 뿌리지 말라”는 비난을 받은 아톰이 “인간을 위해 싸웠건만…”이라며 낙담하는 장면은 원전의 숙명과도 닮았다. 


이런 데즈카의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았거나 곡해됐다. 사람들은 보라는 달은 안 보고 그의 손가락만 쳐다봤다. 패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부흥을 이루자는 열망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고, 아톰은 이런 욕망의 캐릭터가 됐다. 


데즈카는 아톰이 원전의 상징이 돼가는 현실에 적잖이 고심한 듯하다. 데즈카는 타계하기 1년 전인 1988년 한 만화평론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원전에 반대한다고 반드시 써달라”고 당부했다고 최근 일본 언론은 전했다. 데즈카가 생을 마감할 무렵 남긴 경고는 20여년 뒤 현실이 됐다.그는 타계 직전 집필한 회고록에서 “첨단 과학기술이 폭주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행복을 위한 과학기술이 인류멸절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다. 아톰도 과학지상주의 작품이 결코 아님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적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일본 사회를 우리가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데 있다. 한국 사회야말로 아톰을 욕망의 캐릭터로 활용해왔는지 모를 일이다. 최근 방일한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한국의 원전정책에 대해 즉답을 피한다. ‘탈원전’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들이다. 당장 ‘발등의 불’이 아니라는 심산일 것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에서 발생한 ‘죽음의 재’가 현해탄을 건너 날아오는 현실에서 원전문제는 ‘남의 집 불구경’거리가 아니다. 규슈 쪽 원전에서 사고라도 터지면 한반도 남부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원전위험이 상존하는 일본의 이웃나라인 우리가 우리 안전을 위해 당당하게 발언하기 위해서라도 원전정책은 재검토돼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