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류는 있고, 한국은 없다

서의동 2011. 9. 14. 15:28
최근 부임한 도쿄의 공관장이 일본의 주요 언론사 중역을 만났다가 “한국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본방송은 바빠서 못보는 대신 DVD를 사서 챙겨본다는 말에 일본 내 한류(韓流)팬이 많아진 것을 실감하곤 기분이 으쓱해졌다고 한다. 

요즘 일본에선 TV나 서점, 심지어는 편의점에 진열된 상품 포장지에서도 한류의 체취가 느껴진다. TV광고에도 소녀시대와 카라, 동방신기가 나온다. 민방TV의 한국드라마 편성이 과하다며 항의시위가 벌어진 것은 달리보면 한류가 일본 대중문화 속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일본에서 열린 ‘SM타운 라이브 인 도쿄 스페셜 에디션’ (경향신문 DB)


한류붐은 현지 교민은 물론 기자와 같은 체류자들에게도 반가운 일이다. 한 교민사업가는 “공공장소에서 한국말 쓰기도 어려웠던 20여년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류 덕에 한국이 일본인들에게 매력적인 나라가 됐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일본 지지통신이 매달 정기적으로 수십년째 실시하고 있는 설문조사에는 ‘좋아하는 나라와 싫어하는 나라’를 묻는 항목이 있다. 지난 4월 결과를 보면 일본인 응답자 중 ‘한국을 좋아한다’는 비율은 12.0%, ‘싫어한다’는 응답률은 13.0%로 나타났다.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한국에서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졌던 시점의 조사결과 치곤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이 결과에 대해 나름대로 내린 추론은 이렇다. ‘한국에는 대중문화와 음식 정도를 빼곤 일본인들이 호감을 가질 점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머리 속엔 ‘한류’와 ‘한국’이 서로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 아닐까.

최근 일본에서 <한국경제의 진실>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경제평론가 2명이 한국경제는 물론 문화, 역사까지 싸잡아 폄훼하기 위해 기획된 대담집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부끄러운 팩트들이 실려 있다.
“전경련이 발표한 대통령 특사 요청 리스트에는 재벌그룹의 수뇌들이 거의 망라돼 있다.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기 위한 변칙증여와 탈세 등이 죄상의 대부분이다. (중략) 재벌들은 사법처리가 결정되면 어김없이 마스크를 쓰고 휠체어에 탄 채 등장하며 유죄판결을 받아도 수감 전에 사면되거나 특사로 풀려난다.”

기업들이 해외엔 고급품을 싸게 팔고, 국내에는 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비싸게 팔면서 국내 소비자들을 봉으로 만드는가 하면, 수출이 늘어나 통화가치가 올라가야 하는 데도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원화가치를 끌어내리는 사례들이 열거돼 있다.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민생활을 희생하는 사례라고 그들은 명쾌하게 정리한다.
어린이 행복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저, 자살률은 최고 수준인 나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피해부문은 안중에 없고 수출이 얼마나 늘어날지만 신경쓰는 나라…. 일본 경제평론가들의 눈에 비친 한국경제의 ‘일그러진 초상’이다. 삐딱하게 보기로 작정하고 쓴 책이지만 딱히 반론을 펴기도 어려워 보인다. 

이런 한국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한류가 한국인의 삶속에서 빚어진 결정체라는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한류는 그저 삼성의 휴대전화처럼 글로벌 수출전략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수출입국 한국의 또 다른 품목일 뿐이다. 

삼성 휴대전화를 쓰듯 한류를 소비하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별 관심사가 아닐지 모른다. 한국인들이 행복과 자부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한류와 한국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고 일본은 한국에서 한류만을 쏙 빼먹을 수도 있다. 희망도 없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국민이 늘어나면 한국은 한류의 주인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