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오늘

[어제의 오늘]1941년 독일군에 포위당한 레닌그라드

서의동 2009. 9. 8. 17:57
ㆍ900여일간 항전… 함락 모면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역사와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유서 깊은 러시아 제2의 도시다. 18세기 러시아의 개혁군주 표트
르 대제가 유럽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러시아 북서부 네바강 하구 삼각주에 건설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수립 이후 1924년 레닌그라드로 개명했다가 1991년 소련 해체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6월 독일이 300만 병력을 동원해 소련을 침공하면서 대독전선 전방에 위치한 레닌그라드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파죽지세의 독일군은 개전 두달여 만에 레닌그라드 부근에까지 이르렀으나 시민들이 2만5000㎞에 달하는 참호를 파며 항전의지를 불태우자 점령 대신 포위전으로 전환한다. 히틀러도 독일군에 레닌그라드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특별지시를 내린다.

마침내 9월8일 독일군은 라도가 호수를 제외한 보급선을 완전히 차단하고 공습을 시작했다. 인구 300만명의 레닌그라드에 대한 보급이 차단된 뒤 한달여 만에 시민들은 극심한 기아상태에 빠졌다. 밀가루가 떨어지자 톱밥, 목화씨는 물론 말 사료로 쓰던 귀리까지 먹어야 했다. 소련 해군함대가 보낸 곡물수송선이 라도가 호수에서 격침되자 배를 인양해 썩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9월말에는 석유와 석탄이 떨어져 공장가동이 멈췄고 11월에는 교통수단 통행이 중단됐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아사자들이 속출했고, 사람들은 인육에까지 손을 댔다. 하지만 강원도만한 크기의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으면서 최악의 사태는 모면했다. 말이 이끄는 수송부대가 호수를 통해 레닌그라드에 물자를 실어 날랐고, 이듬해 4월까지 50만명의 시민들이 결빙상태의 호수를 건너 탈출했다. 1942년 여름에는 라도가 호수 밑바닥으로 석유 파이프라인이 건설되기도 했다.

1944년 1월27일까지 900여일 가까이 상상조차 어려운 굶주림과 추위, 폭격에 맞선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분투는 소련국민에게 용기를 심어줬고, 스탈린은 1945년 레닌그라드에 ‘영웅도시’의 칭호를 부여했다. 포위기간에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뜨거운 동지애와 전우애로 서로를 격려하고 저항을 이어갔다. 나이 많은 시민들이 “꼭 싸워 이기라”며 젊은이들에게 배급을 양보하고 희생을 자처했다는 일화도 있다. 세계적인 음악거장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투쟁과 애국심을 찬양하는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독일군이 패퇴한 뒤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됐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며 만세를 불렀다. 포위전의 희생자는 소련정부의 공식발표로는 67만명이지만 최대 120만명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