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쓴 글

시위대 버리고 기득권 지킨 軍

서의동 2011. 2. 11. 16:38

이집트 군부가 11일(현지시간) 퇴진 요구에 직면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끝까지 지지하고 나선 것은 ‘올해 하반기까지’ 현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무바라크 대통령으로부터 전날 권력을 물려받은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이 행정권을, 군이 물리력을 나눠 갖는 방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겠다는 포석인 것이다. 


군부가 무바라크·술레이만·군부 등 기존 통치체계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9월 대선까지 정국을 관리하겠다는 것은 현 상황에서 무바라크의 ‘명예퇴진’이 정국안정은 물론 기득권 보호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무바라크의 즉각 퇴진을 요구해온 민주화 시위대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어서 이집트 정국은 다시 예측불허의 양상으로 치닫게 됐다.

술레이만 부통령

군이 이날 발표한 2차 코뮈니케는 9월 대선 때까지 술레이만에게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무바라크의 방침을 지지하고 국가수호를 하겠다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군은 모하메드 탄타위 국방장관이 주재한 최고지휘관회의를 이틀째 연 뒤 국영TV를 통해 발표한 2차 코뮈니케에서 “현 상황이 종료되는 대로” 시위대 요구를 받아들여 30년간 시행돼온 비상계엄령을 철폐하겠다고 약속했다. 역으로 말하면 시위상황이 진정되지 않는 한 계엄령을 유지하겠다는 말이다.

군이 국가안보에 가해지는 모든 위협에 대해 경고하면서 시위대에 일상 복귀를 촉구한 것 역시 ‘정상화’에 무게를 실은 것이다. 전날 발표된 ‘코뮈니케1’에서 군이 국가수호에 돌입할 것이라면서도 “시민의 정당한 요구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강조한 것과도 뉘앙스가 달라졌다.

군부가 통수권자인 무바라크 대통령은 물론 술레이만 부통령도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10일 최고지휘관회의를 열었다가 다음날 다시 회의를 연 배경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일고 있다. 이집트 군사전문가 폴 술리반 국방대학 교수는 이날 “이집트 군 최고지휘관회의는 이스라엘과의 중동전쟁이 벌어진 1967년과 73년 두 차례 외에는 열리지 않았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그만큼 이번 민주화 시위를 군이 긴박하게 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산 알 로웨니 카이로 방어사령관이 10일 타흐리르 광장에 나와 “오늘 시민들의 모든 요구가 충족될 것”이라는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

10일 하산 알 로웨니 카이로 방어 사령관이 타흐리르 광장에 등장해 “오늘 모든 요구가 총족될 것”이라고 말해 시위대의 환호를 받고, 11일 일부 군장교들이 시위에 동참한 점으로 미뤄 군부 내에서 대처방안을 놓고 갈등이 불거졌을 가능성도 있다.

일각에선 군부가 이번 지휘관회의를 통해 권력을 사실상 접수했으며, 술레이만에게 형식적인 권한을 위임하는 방안을 택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 AP통신은 이집트군이 군사력과 홍보력을 적절히 활용해 국익의 최종 수호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부드러운 쿠데타(soft coup)’에 성공한 셈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술레이만 부통령과 공군 출신의 아흐메드 샤피크 총리 외에 이번 회의를 주재한 탄타위 국방장관과 사미 하페스 에난 참모총장 등 군부인사에게 시선이 쏠리고 있다. 에난 총장은 젊은 군인들을 대변하며 친미 성향이 더 강해 미국도 선호한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하지만 군이 무바라크 즉시 퇴진 요구를 거부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함으로써 18일째 지속되고 있는 민주화 시위가 조기에 마무리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민주화 시위에 중립을 지켜온 군이 사태 조기수습을 위해 무력진압에 나설 가능성도 크지 않은 만큼 시위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