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오늘

[어제의 오늘]1984년 북한의 대남 쌀 지원 

서의동 2009. 9. 28. 18:23
ㆍ첫 물자교류… 남북 해빙 ‘물꼬’

1984년 8월31일부터 4일간 서울·경기·충청 일원에 내린 집중호우로 서울지역이 최악의 홍수사태를 겪었다. 한강이 위

험수위인 10.5m를 넘어서면서 한강대교 등 4개의 차량통행이 전면통제됐고, 161개 지역 2만2500가구에서 9만38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저지대인 강동구 풍납동과 성내동 등은 주택들이 물에 잠기며 ‘수중고도’가 돼 버렸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지는 대형 수재였다. 전국적으로는 사망및 실종 189명, 이재민 35만1000명, 부상 153명에 피해액은 1333억원에 달했다.

남한의 수해소식을 전해들은 북한은 9월8일 방송을 통해 수해지역 이재민들에게 쌀 5만석,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남측은 이 제의를 수용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했다. ‘정치공세’에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내부에서 적지 않았다. 국제 적십자사의 구호물자 제공제의조차 사양한 터였고, 한해 전인 83년 10월9일 버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테러의 앙금도 가라앉지 않았던 시점이다.

하지만 정부는 대남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로서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개최를 앞두고, 한반도의 평화분위기 조성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사는 북한의 제의가 온 지 6일 만인 9월14일 수락성명을 발표했고, 이어 18일 대한적십자사 이영덕 부총재와 북한적십자사 한웅식 부위원장 등이 판문점에서 실무접촉을 가졌다. 북측은 처음에 자동차와 배편으로 서울·속초·부산에 구호물자를 수송하고 북한기자들이 수해지역을 직접 방문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결국 판문점과 인천·북평(동해)항으로 최종 타결됐다. 이에 따라 9월29일부터 10월4일까지 육·해로를 통해 북한 적십자의 수해물자가 전달됐고, 남측은 담요, 카세트 라디오·손목시계·양복지 등 18개 품목이 든 선물가방 848개를 북한 대표들에게 답례품으로 증정했다.

북한쌀은 수해지역 주민들에게 33㎏에서 66㎏까지 분배됐다. 쌀이 좋지 않다고 떡을 해먹는 이들도 있었지만 북녘 쌀로 제사를 지내겠다는 실향민들도 있는 등 반응은 다양했다. 북한물자가 인도되던 마지막 날 일간지들은 ‘위장술책 속게 되면 남북대화 공전한다’는 대공표어를 싣기도 했다.

북한 적십자사의 수해물자 지원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간 물자교류로 기록됐고,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구실을 했다. 물자가 인도된 지 8일 만인 10월12일 남측은 신병현 당시 부총리가 남북경제회담 개최를 제의하며 화답했다. 이듬해인 85년에는 73년이후 중단됐던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12년 만에 재개됐으며 9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